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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관련생활정보

뉴 프런티어 중국 대개발을 알아봅시다.

이곳이 바로 어제 준공한 중추안(中川) 신공항입니다. 한국의 귀빈을 이리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822일 우리 일행이 란저우 공항에 내리자 현지의 안내자가 자랑삼아 전한 인사였다. 간쑤성 란저우는 서부 대개발의 뉴 프런티어였고, 신공항은 그 가시적 성과였다. 란저우와 신장웨이우얼(新疆維吾爾) 자치구의 우루무치를 연결하는 1000킬로미터의 고속도로 공사가 완공되면 서역으로 통하는 하서회랑(河西回廊)에 현대판 실크 로드가 개통된다. 란저우에서 상하이(上海)까지 중간중간에 잘린 1500킬로미터 철로가 이어지면 중국판 오리엔탈 특급열차가 달릴 것이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도시 연변은 밤새워 불을 밝히고 길을 뚫는 공사장 소음으로 귀가 먹먹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60~70년대 우리의 개발 현장으로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당시 한국을 찾은 외국인의 눈에 가장 신기한 광경의 하나가 야간 작업이었다. 그것은 가난이 강요한 참상 대신 잠조차 잊고 일에 열중하는 근면의 상징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런 면에서는그것이 무슨 명예도 아니고 훈장도 아니지만중국이 우리한테 수십 년 처졌을지 모르겠다.회족(回族)임을 나타내는 하얀 터번의 노인에게 빌딩 벽에 금색으로 빛나는 서부 대개발간판을 가리켰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시가 아니라면,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반응이리라. 이렇게 서부 내의 서부가 또 있었다.시대가 구호를 필요로 한다면 오늘의 중국이 만들어낸 구호는 단연 서부 대개발이다. 충칭(重慶)을 포함한 서부 내륙의 9개 성은 중국 면적의 56퍼센트와 인구의 23퍼센트를 차지하지만, 몇몇 도시를 제하면 주민 소득이 동부의 10퍼센트에도 못 미친다. 우리가 찾은 란저우(蘭州)만 해도 인당 국내총생산이 446달러로서 선전(?)4500달러에 비하면 1/10 수준이었다. 중국 국토 전체로 보자면 란저우는 서부가 아닌 중부에 속하며, 그보다 더 서부로 가면 격차는 한층 더 커진다. 중국 사회과학원의 지속 가능 발전전망에 따르면 간쑤(甘肅)성은 2062, 티베트(西藏) 자치구는 2090년에나 오늘의 서구가 누리는 25000달러 정도의 현대화 목표를 이룬다. 60년 계획과 90년 전략이라! 뻥은 심하지만 뭐 그리 나쁠 것도 없지 않은가? 이들을 어서 양지로 끌어내려는 중국판 햇볕 정책이 서부 대개발이다 란저우는 흙의 도시였다. 주위는 온통 민둥산이고, 신작로는 흙먼지로 뒤덮였다. 도시의 시멘트 문명에 물든 우리로서는 그 원시적 도전이 오히려 반가웠다. 푸석한 흙냄새와황무지 하늘에 걸린 조각달의 이국 정취가 마구 행인의 심사를 흔들었기 때문이다. 그래, 어쩌면 자신이 2000년 전 파지리크 고원의 천막에서 허리에 손 칼 차고, 평원의 거센 바람에 붉어진 뺨을 털에 대고 잠들던 유목민 여자가 아니었을까 하며 전생을 의심한 어느 작가가 있었지. 그러고 보니 그의 상념대로 말 젖 냄새와 초원의 마른 풀냄새가 코끝에 맴도는 듯도 하다. 불과 800킬로미터 밖에서여기서는 이웃이다둔황(敦煌)이 유혹하는데 낙타를 사서 실크 로드여행이나 떠날까? 잡념을 떨치고 란저우 시내의 둔황 박물관 견학으로 욕심을 다스린 것은 덜미를 잡는 바쁜 일정 때문이었다.연간 400밀리미터의 강우량과 그중의 45퍼센트는 증발해 버리는 이 지방의 척박한 자연 환경이 땅과 사람을 지치게 했다. 그래서 인재와 기술과 투자가 타지로 빠져나가고, 그럴수록 서부 빈곤은 점점 심해졌다. ()하가 시내를 가로지르고, 양쯔(楊子)강이 멀지 않아서 그런지 하늘의 비는 적어도 땅 위의 물은 모자라지 않았다. 수력 에너지 가운데 오직 14퍼센트만이 발전(發電)에 이용될 만큼 개발이 늦은 것이 문제였다. 물론 정책의 오류도 있었다. ‘먼저 부자가 되라는 덩샤오핑(鄧小平)의 선부론(先富論)은 동부 연안 지대의 발전을 집중적으로 겨냥했고, 그 결과 서부는 점차 발전의 사각 지대로 밀려났다. 서부 대개발은 그 차별에 대한 동부의 보상일 터였다. 그러나 란저우 외사판공실의 한 관리는 선부론은 우선 순위의 문제이며, 동부에서 서부로 관심의 이동은 자연적이란 대답으로 정부의 정책을 옹호했다. 그리고는 1978년 개혁개방 당시 320위안이던 주민의 소득이 작년에는 3428위안으로 올랐다는 통계 수치를 내밀었다. 못살았어도 정책은 옳았다는 것인데, 모범 관리들은 어디서나 이렇게 모범적인 말만 한다.거리의 현수막에서 옥상의 간판까지 도시는 온통 대개발 구호 일색이었다. 서부의 사나이 존 웨인과 게리 쿠퍼 대신 중국 지도부는 이번에도 을 내세웠다. 굳이 연고를 찾는다면 3선 개발(三線開發)이 있다. 1960년대 미국의 베트남 참전으로 중국은 안보 위험을 절감하고, 미국의 포탄이 날아들지 못할 서부 산악에 군사 기지를 건설하고 공업 시설을 이전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몽고에 배치된 소련 미사일이 뒤통수를 겨누고 있었다. 당시 소련 미사일의 1/3이 중소 국경과 중몽 국경으로 옮겨졌고, 거기 증파된 군인만도 100만이 넘었다. 1963은 대표단을 이끌고 모스크바에 가서 일대 담판을 벌였지만,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안보 논리로도 경제의 효율로도 3선 개발은 완전 실패였으며,  당시 이 작전을 지휘한 사령관의 하나가 이었다. 그 실패의 흔적을 직접 목도하고 싶었지만 사전 허가가 없다는 이유로 우리의 방문 요청은 완곡히 거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