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은 바다로 나가 약탈해 온 전리품을 특권층이 독점하지 않고 풀어 놓고 함께 나누었다고 한다. 바이킹은 이것을 뷔페(buffet)라고 했으며, 여기서 북유럽이 자랑하는 사회복지 제도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그러면 해적으로 알려진 바이킹은 누구인가? 스칸디나비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협강(vik)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의 바이킹(viking)은 처음에는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았다. 그러나 협소한 땅에 인구가 늘어나자 고기를 잡느라 발달한 조선술과 항해술을 이용, 바다 멀리까지 진출해 노략질을 일삼게 되면서 바이킹은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895년 파리를 공격하는 바이킹들. 이렇듯 수로를 이용하여 내륙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 오곤 하는 관계로 바이킹들은 서유럽 일대에서 공포의 대상이었으나, 북해 상권을 형성하고 키예프 공국을 건설하여 발트 해로부터 흑해에 이르는 통상로를 여는 등 상업 방면에서도 업적을 남긴 것은 물론 그린란드와 아메리카 대륙을 최초로 발견한 탐험가들이기도 했다.역사적으로 바이킹 시대라고 일컬어지는 대략 800-1100년에 이들은 통상로의 개척을 통해 경제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노르웨이 바이킹의 경우 에리크 더 레드(Erik the Red)가 중심이 되어 984년에 그린란드를 발견했다. 또 에리크 더 레드의 둘째 아들 에릭손(Leiv Eriksson)은 1000년에 북아메리카 연안에 도착했다. 당시 에리크 더 레드는 그들이 발견한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서 대부분 얼음과 눈으로 덮여 있는 그곳을 그린란드 라고 명명했다. 반면 에릭손이 발견한 북아메리카 대륙은 비옥한 농토와 알맞은 기후, 풍부한 자원에도 불구하고 원주민들이 새로운 침입자들에게 적개심을 보이는 데다, 친구와 친척들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람들이 오래 머물기가 어려운 관계로 여러 차례에 걸친 탐험만 이루어졌을 뿐 결국은 원주민과 에스키모만이 사는 곳으로 남게 되면서 결국 15세기 말에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가 재발견하기까지 잊혀진 대륙으로 지내야 했다.1380년 덴마크의 수중으로 넘어간 그린란드는 1400년경의 기후 변화로 인하여 외부와의 연결이 끊긴 채 잊혀져 있었다. 1712년에 바이킹 후손들의 신앙심을 키워 주기 위해서 선교사들이 다시 그 땅을 찾아갔을 때 바이킹 후손의 생존자는 없고 에스키모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이들 바이킹은 또 상업에 종사하면서 북해상권을 형성하기도 했는데, 거기에 커다란 역할을 한 스웨덴 바이킹의 활약상을 알아보자. 이들은 발트 해로 나아가 흑해와 콘스탄티노플을 연결하는 통상로를 개척하고 노브고로트 공국나중에 한자 상권의 중심지가 된다-과 키예프 공국을 건설했다.스웨덴 바이킹들은 주로 가죽, 모피, 생선기름, 꿀, 노예를 향료, 견직물 등과 교류했는데, 이 시기에 중국은 물론 신대륙까지 진출할 정도였으니 콜럼버스보다 한참 앞선 해양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유대와 아랍의 상인들과 교류하는 가운데 흡수한 비잔티움 문화와 그리스 정교를 러시아를 비롯한 북부 지역에 소개하기도 했다. 결국 이들은 베네치아와 마찬가지로 비잔티움을 비롯한 동방의 문물을 유럽에 전달해 주는 중개자의 임무를 수행한 셈이다.사정이 이렇고 보면 당시 분열된 프랑크 제국은 남쪽으로는 7세기경 이슬람교도들의 지중해 봉쇄와 북쪽으로는 밀고 내려오는 바이킹의 침략에 전전긍긍하면서 육지에 한정된 정체성(停滯性)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프랑크 제국이 자급자족적 장원 중심의 봉건제에 전력을 기울인 것도 그래서인데, 바로 그 때문에 아랍 인의 중개로 베네치아·제노바 등지에서 원격지 교역이 활성화되기까지 프랑크 제국의 경제는 침체되어 있었다.역설적이기는 하지만 바이킹 시대의 종말을 영국의 왕통 일람표에서 읽을 수 있다. 1042년 덴마크의 영국 왕 크누트(Cnute)의 죽음과 함께 영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영국 왕위쟁탈전에서 노르웨이의 왕 하랄 3세(Harald Ⅲ)가 1066년 죽음으로써 바이킹의 시대는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프랑스, 포르투갈의 강가 도시는 물론이고 토스카나까지 약탈 원정을 했던 덴마크 바이킹은 영국을 2차례에 걸쳐 침략하고 비록 짧았지만 1016-1042년 사이 합법적인 왕으로 통치했다.그러면 바이킹 시대는 왜 종식되었을까? 기독교와의 접촉이 곧 바이킹의 약세를 초래했다고 본다. 기독교로 개종을 한 바이킹이 교역에 치중하면서 그곳의 문화권에 융화, 흡수되어 해양 민족으로서의 그들의 정체성을 상실한 것이다.십자군 원정으로 지중해가 다시 기독교도의 수중에 넘어오고 바이킹의 시대도 끝난 12세기에 유럽의 상업은 꽃 피게 된다. 콜럼버스보다 한 발 앞서 신대륙을 발견한 바이킹의 모험심, 전리품을 공동으로 소유했던 바이킹의 뷔페 정신이 그들의 약탈성으로 인하여 역사에서 가려지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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